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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with ... 영화

넷플릭스 - 영화, 옥자 (2017), 폭력적인 미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다.

by story-opener 2020. 11. 8.

 

Okja


어드벤처/액션/드라마
한국, 미국
2017.06.29 개봉
120분,
12세 이상 관람가


감독) 봉준호
주연) 틸다 스윈튼, 폴 다노, 안서현

 

 

 

우린 집으로 갈 거야, 반드시 함께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에게 옥자는 10년 간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소중한 가족이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글로벌 기업 ‘미란도’가 나타나 갑자기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가고, 할아버지(변희봉)의 만류에도 미자는 무작정 옥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여정에 나선다.


극비리에 옥자를 활용한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옥자를 이용해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질렌할), 옥자를 앞세워 또 다른 작전을 수행하려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까지.


각자의 이권을 둘러싸고 옥자를 차지하려는 탐욕스러운 세상에 맞서, 옥자를 구출하려는 미자의 여정은 더욱 험난해져 간다.

 

 


 

 

 

영화 '옥자'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놓고 꼬집으며 비틀어대고 난도질하면서 그 어두운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미란도 그룹의 새로운 프로젝트 홍보이미지 속에서 루시 미란다는 완벽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미란도 그룹의 슈퍼돼지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시작되고 그 문제 해결방법도 그들이 열쇠를 쥐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영화를 바라본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란도 그룹, 즉 낸시 미란도와 루시 미란도 쌍둥이 자매라고 생각됐다.

 

 

더불어 영화에 나오는 동물해방전선 ALF 라는 조직은 미란도 그룹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모습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사심 가득한 잘못된 통역으로 미자의 의견이 묵시되고 옥자가 실험실에 들어가게 되서 강제교미를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 제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미자와의 사이에서 통역을 했던 케이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다. 그러나 그 이유가 통역을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흠집을 냈다는 것에서 분노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루시와 낸시라는 쌍둥이를 통해 미국 자본시장의 겉과 속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미란도 그룹과 ALF를 통해 미국자본주의 구조의 겉과 속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보여준다.

 

 

생산공장에서 강제교미를 당한 옥자는 다음날 미자를 만나자 갑작스런 공격을 가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본 ALF의 리더인 제이는 옥자를 향해 무기로 내려치려하자 그의 폭력을 막아내는 미자.

 

그러나 미자의 고군분투가 없다면 이들의 민낯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들이란 미란도 그룹과 ALF 모두를 의미한다.

 

영화는 미국 대기업의 글로벌 프로젝트에 한국의 한 소녀가 도전장을 내미는 거래 과정에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천박하고 얄팍한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고, 반면에 옥자를 실험실로 보내는 과정 속에서 ALF라는 조직이 동물해방을 표피로 그 속에 들어있는 숨은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ALF를 탄생시킨 건 미란도 그룹이므로 영화 속에서는 미국 자본주의의 또다른 쌍둥이라고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영화의 해결 단계인 끝부분이 비교적 속시원하지 않은 것도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미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린 어떤 방법을 취하며 노력했는지 돌아보게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에 있는 미란도 그룹의 프로젝트란?

 

 

 

그렇다.

그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슈퍼돼지를 만들었고 그걸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프로젝트다.

그리고 그 구원의 시작은 10년 후, 26마리 중에서 가장 크고 맛도 좋은 슈퍼돼지를 선정하는 날을 기점으로 삼겠다고 발표한다.

 

 

이야기는 이 프로젝트의 희생양이 될 슈퍼돼지 26마리 중 한 마리인 옥자를 탈출시키기 위한 미자의 도전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왜 2007년 뉴욕에서 시작될까?

 

우리는 기억한다.

아니, 적어도 지금의 많은 대중들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미국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알고 있다.

비록 그 상황이 한국의 개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다해도 수 많은 뉴스와 언론의 이슈 덕분으로 알 수 밖에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2008년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를 시작으로 세계를 금융위기에 빠뜨린건 사실이다.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결과적으로 뭔가의 생명을 담보로 부를 착취한다는 개념에서 미국 자본주의는 폭력적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도 마찬가지다.

 

신용이 낮은 정크상품을 수익안전보장보험상품인것처럼 파생상품으로 둔갑시켜 신용도가 밑바닥인 계층까지 팔아 치운 금융권력과 그들의 파생상품을 떠안은 피해자들은 담보로 잡힌 집을 빼앗기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다. 한 때 모두가 배불리 부를 탐식하지 않았냐며 반기를 올리지만 정작 부를 탐식한 자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희생시켜 그들의 부를 축적시킨 것인지 되묻게 만든다.

 

그런 사실을 생각한다면 2007년 뉴욕이라는 이 배경만으로도 영화가 비판하고 싶어하는 대상은 다름아닌 미국 자본주의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장면의 배경이 어째서 단상위의 하이힐일까?

 

제대로 된 단상도 아닐뿐더러 정확히 올라 설 자리를 표시해 놓은 듯한 구두바닥 모양이 그려진 작은 원형 단상과 그 위에 위태롭게 올라선 하이힐 신은 여성의 발.

 

이 하이힐을 신은 여성은 다름아닌 루시 미란도다. 그녀는 미란도 그룹 창시자인 아버지를 뒤이어 자신의 쌍둥이 언니 낸시 미란도가 이루어놓은 미란도 그룹의 다음 리더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루시의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주고 모든 걸 이야기해주고 있는 장면으로 보여진다.

 

자신의 발에 맞지 않는 남성의 구두바닥 모양

지나치게 높은 하이힐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

한 발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는 작은 원형 단상

 

누군가의 꼭두갂시로 서 있는 듯한 그 모습은 영화 내내 그녀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다는 걸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치아교정 중인 루시 미란도

 

 

실제로 루시 미란도는 경영에 집중하기 보다 비주얼에 집착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 이유는 쌍둥이 언니때문일지도 모른다.

 

낸시 미란도는 영화 후반부에 프로젝트에 실패한 루시에게 경영 감각이 없다는 걸 애둘러 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루시는 아버지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는 낸시의 그림자에 가려져 그 존재감을 무시당하고 살았던건 아닐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은 단 하나. 외모의 변신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낸시와 루시와의 전화통화를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경영 감각으로는 따라 갈 수 없으니 비주얼로 해결하기 위해 학창시절 뚱뚱했던 외모를 다이어트로 탈피하게 되면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루시는 회사의 모든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국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던 와중에 언니의 큰 실수로 본인이 얼떨결에 CEO가 된 것 같아 보인다.

 

이 사실은 영화 중반 회의장면에서 미란다 그룹의 간단한 연혁과 언니의 실수가 무엇인지 나오기때문에 루시가 어떻게 CEO가 됐는지 설명해주고 있다.

 

아직 진행중인 치아 교정 모습도 그렇고 한국에서 벌어진 테러때문에 주가가 하락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회의에서도 손톱만 물어뜯는 루시 대신 낸시의 분신처럼 행동하는 프랭크에 의해 아이디어를 얻어 겨우 궁지에서 풀려난 루시는 애꿎게도 수의사인 죠니에게 화풀이를 한다. 이런 모습에서도 경영적으로 문제 해결능력은 아버지나 언니를 따라잡지 못하는 걸 보여주고 있다.

 

결국 못난 모습들을 뜯어고쳐가며 외모를 변신시키지만 아무리 애써도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기업 마인드는 따라잡을 수 없는 루시는 프로젝트 실패로 한계를 드러낸다.

 

싸인 연습만 관심있는 루시 미란도

 

겉모습의 변화에만 집착하는 루시를 비꼬기라도 하듯 언니 낸시는 자신의 초상화를 루시에게 보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중요한 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이윤을 만들어 내는 경영센스(?)라는 걸 말하려는 듯 낸시는 영화 후반부에서 초상화와 전혀 다른 외모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란도 그룹의 주가가 하락한 시점에서 낸시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낸 건 자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걸 암시하기도 한다.

 

 

루시가 이미지에 집착하는 부분은 일적인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언니 낸시 미란도의 표현에 의하면 '루시의 요란한 마케팅'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알맹이 없는 요란한 마케팅은 결국 뉴욕에서 진행되는 슈퍼돼지 축제에 동물해방전선 ALF의 난입으로 경찰이 투입되자 실패로 끝나게 된다. 홍보를 통한 매출 극대화는 커녕 이미지 실추만 얻게 되고 이를 계기로 루시는 낸시에게 밀려나면서 다시 낸시가 정면에 나서게 된다.

 

 


 

 

미란도 그룹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 자본주의의 실상은 수 많은 죽음을 기반으로 축적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슈퍼돼지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동물해방전선 ALF 의 테러사건으로 미란도그룹은 주가하락 위기에 봉착한다.

 

미란도 그룹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출시하고 10년만에 그 결과를 맺기 직전 루시는 프로젝트의 테러를 받게 되면서 그룹의 주가하락을 불러오게 만들고 그 대안책을 논하기 위해 회의를 수집하게 된다.

 

회의를 하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미란도 그룹이 과거 어떤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에서도

비단 미국의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전 세계를 상대로 또는 자국민을 상대로 어떤 짓을 하며 부를 만들고

그 기반으로 금융자본을 축적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질문은 루시가 스마트폰 속의 낸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즉, 이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참석자, 낸시 미란도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루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살갗이 불타는 네이팜탄을 만들었단다'

 

미란도 그룹의 부는 베트남 전쟁당시 대량살상용으로 사용된 네이팜탄을 제작하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것이다.

이 장면은 미국 자본주의가 무엇을 기반으로 축적되었는지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결국 슈퍼돼지의 살상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발상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이유도 이 장면에서 모두 설명되는 부분이다.

 

그럼, 언니의 실수는?

 

 

그렇게 언니의 실수로 CEO 자리에 앉은 루시가 한 일은?

 

그러니까 미국 자본주의가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라는 것들이

 

아버지 미란도 : 네이팜탄으로 전쟁시기 부를 창출함
낸시 미란도 : 독성 폐기물 무단방류로 호수가 폭발함. 그래서 CEO자리에서 내려옴.
루시 미란도 : 가장 악명 높은 농화학 회사를 가장 인기있는 기적의 돼지 사육 회사로 탈바꿈시킨 (이미지 세탁)

 

이런 방법이었다.

 

결국 이들은 약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부를 착취하고 이제 새로운 착취대상을 만들어내기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탈바꿈하여 새로운 식량을 살상을 통해 만들어내겠다는 신제품 소식에 급상승하는 미란도 그룹의 주가상승과 그 이면이 드러나자 가치가 떨어질거라는 생각에 주가가 떨어지는 것도 모두 그 속내는 하나로 통한다.

 

'뭐가 됐든 돈만된다면 무슨 상관이냐!'

 

 

이런 자본시장의 마인드를 비판하는 장면은 옥자가 생산공장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수 많은 묘지들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미자를 이용해 다시 한 번 그룹의 이미지를 세탁하려 했지만 

결국 프로젝트 홍보행사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현장에 낸시 미란도가 나타난다.

 

 

낸시와 루시

 

이들은 왜 쌍둥이로 설정 됐을까?

 

 

낸시가 루시에게 보낸 초상화를 떠올린다면 지금의 낸시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하고 있다.

루시는 그런 낸시를 외면한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 자본주의의 겉과 속을 그대로 반영한다.

 

낸시는 얄팍하고 천박한 미국 자본주의의 이면을 담고 있고,

루시는 그런 이면을 감추기 위해 온갖 마케팅으로 포장하는 겉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낸시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하며 냉정한 어둠을 상징하고

루시는 그보다 덜한 설득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루시가 하려던 설득이 실패한 이유도 진심에서 일어나는 설득이 아니라 그런척 하려는 겉모습을 통한 설득이었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낸시와 루시가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건 생명을 담보로 이득을 취한다는 점이다.

 

이와 반대로 미자와 옥자는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관계인 반면,

낸시와 루시는 생명을 죽이는 관계로 연결된 사이라는 점에서 생명에 대한 존중이 미국 자본주의에서 상실된 이유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냉전시대를 이용해 공포정치를 했던 미국도 그 시절 전쟁을 기반으로 지금의 부를 축적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즈니스 감각은 끝내줬다는 그 뒷말은 정말 치를 떨게 하는 대사였다.

전쟁으로 그 많은 인명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배불리게 만들어줬으니 그거면 충분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언가의 생명을 담보로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낸시는 루시를 떠난다.

 

그리고,

 

기자회견은 걱정하지마, 동생아.
기자들 앞에선 내가 너인 척할게.

경찰들 오네.
회사 변호사들은 투입 못 해 주니까
이해하길 바란다.

 

프랭크!

 

 

훌륭하십니다.
루시의 요란한 마케팅 모조리 중단시켜.
최대한 빨리.

 

물론입니다.

 

FDA 승인은 이미 받았지?
받았죠.

 

그런데 오늘 사건으로 소비자들 반응이 어떨지...

 

가격이 싸면 다들 먹어.
초반 매출은 아주 좋을 거야.

 

전에 말한 대로 실험실은 폐쇄하고,
오늘 밤에 생산 라인 둘러볼 거니까 임원진 소집해.
휴가 중인 놈들도.
돼지들은 죄다 생산 라인에 넣고.

 

베스트 슈퍼돼지도요?

 

예외는 없어.

 

 


 

영화는 낸시의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와 대량생산의 어둠을 드러내면서

클라이막스로 들어선다.

 

 

 

미자가 목격한 이 모습들은

현재 인류를 지탱시키고 있는 자본주의가 무엇을 담보로

거품을 키워가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미자가 목격한 이 장면들이

전쟁터의 모습과 다를바 없지않을까.

 

 

그리고 그곳에서 미자는 낸시를 만난다.

 

 

미자는 이미 한 차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상황을 겪은 터라 그 모습이 상처투성이로 피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기키기 위해 그들에게 묻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살인적이기만 하다.

 

죽은 것만 판다는 그 말은 미국 자본주의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확인사살에 가까운 대답이다.

 

 

봉준호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옥자는 육식을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에 따른 대량생산 시스템을 비판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국의 자본축적을 위해 대량생산 시스템을 정착시켰고,

그 시스템 정착을 위해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생명을 담보로 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대량생산은 왜 존재해야 하는 걸까?

아니, 자본주의는 왜 존재하는 걸까?

 

 

그 모든 질문의 본질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70억 인구수를 떠올리게 되고,

그 속에서 1%의 상위계층이 독점하고 있는 소득을 떠올리게 만든다.

 

더불어 자본주의가 만든 부익부 빈익빈의 극한 상황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이 너무 큰 좌절을 불러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미자와 옥자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하게 된 한 마리의 새끼 돼지도 함께.

 

 

 

미자의 집에는 두 명의 사람과 두 마리의 슈퍼돼지로 가족이 구성됐다.

하지만 그 중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생을 다하게 된다면 가족은 다시 3명(?)이 된다. 

혹은 옥자가 산으로 독립해 나가도 가족은 다시 3명(?)이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과 사를 순환하며 가족은 3명이거나 4명이거나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필요 이상으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을.

 

주어진 환경에 맞춰 서로 공존하며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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