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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and ... 여자

우리들 (2015)

by story-opener 2020. 9. 3.

The World of Us


드라마
한국
2016.06.16 개봉 94분,
전체관람가

 

(감독) 윤가은
(주연) 최수인, 설혜인, 이서연, 강민준

 

 

마음이 통했으면 좋겠어


그 여름, 나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내 마음이 들리니”

 

언제나 혼자인 외톨이 선은 모두가 떠나고 홀로 교실에 남아있던 방학식 날, 전학생 지아를 만난다.
서로의 비밀을 나누며 순식간에 세상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된 선과 지아는 생애 가장 반짝이는 여름을 보내는데,
개학 후 학교에서 만난 지아는 어쩐 일인지 선에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선을 따돌리는 보라의 편에 서서 선을 외면하는 지아와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선.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해보려 노력하던 선은 결국 지아의 비밀을 폭로해버리고 마는데...

 

선과 지아.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우리를 말하는 걸까.

무력한 우리?
바보 같은 우리?
착하기만 한 우리?
그래서 늘 얼버무리기만 한 우리?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어 짓밟는 것 말고는 무리에 속할 수 없는 우리?

결국 왕따의 무리에서 또 다른 왕따를 만드는 우리?

 

 

 

지아는 선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할 말 있으면 해.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


늘 주눅 들어 있는 선에 비해 지아는 무리의 폭력적인 언행에 물러서지 않는 편이었다.
그건 부족하지 않은 용돈의 힘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용돈의 힘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자 지아도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된다.

 

경제적인 과시로만 버틸 수 없는 상황.
경제적인 과시는커녕 아무것도 없기에 버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음을 하게 될까...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과 강릉 여중생 집단폭행 생중계 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때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렸다.

아이들은 왜 폭행이라는 답을 선택했던 걸까.
무엇을 위한 폭행이었을까.


그들이 공개한 영상과 카톡 메시지의 가장 본질적인 동기는 페북스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페북스타의 방법으로 폭행을 선택했던 걸까.
가해자 자신의 손이 부어오를 정도의 폭행을 과시하는 것으로 페북스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페북스타가 되고 싶은 이유는 뭘까?

 

 

 

영화 속 두 친구는 또래 사이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비뚤어진 선택들을 하게 된다.
무리 속에서 아이들이 선택하는 관계 맺기는 단 하나뿐이다.

 

 

 

 

# 과시.


과시는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속이기 위해 하는 행동 중의 하나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 강자 앞에서 과시하는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는다.
진품 앞에 짝퉁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과시는 허세와 연결되어 있고, 허세는 허풍과 거품으로 구성된다.
과시는 거짓 그 자체다.
과시는 약자가 무리에게 선택받기 위해 취하는 행동 중의 하나다.

마치 수컷 공작처럼.

 

다른 수컷보다 더 크고 화려한 꼬리를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암컷의 선택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 크고 무거운 꼬리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현실보다 짝짓기를 위해 목숨까지 단보로 내거는 그 모습은
과시욕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동물의 세계 그 자체다.

 

약자의 과시욕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경제적 과시의 한계를
무력적 과시로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과시로 소통하는 곳이 아니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대응해야 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약자.
그들은 현실 속에서 자신이 약자라는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약자인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도 무리의 중심에서 선과 지아를 괴롭히던 그 아이 역시
시험성적에서 패배한 약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실패와 부족한 실력 앞에 무너지게 된다.

두려움은 그때 찾아오기 마련이다.

 

더 이상 과시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날 때.
과시욕에 빠져있던 약자는 폭력적인 가해자로 등장하게 된다.

비로소 본성을 드러낸다.

 

상대를 도둑으로 몰아넣고,
상대의 약점(또는 거짓)을 드러내 온갖 구설수로 비방하며,
두 번 다시 그 어떤 과시도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약자.


어린(정보 취합 및 분석능력이 떨어지는 상태)
여자(사회적 기여도가 저평가된 존재)
아이(생산적 의미가 저평가된 존재)

 

이 조합은 전형적인 사회약자의 포지션이다.
거기에 평범함이나 가난과 빈곤함이 추가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약자가 되는 것이다.

어린 여자 아이(약자)는 당연히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보호자)의 경제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결국 부모의 위상이 어린 여자 아이의 위상이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재미있게도 그런 부모에 반항하는 철부지 아이들로 비추고 있지 않다.
그건 변화된 사회의 현실적인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벌이하는 부모.
조부모의 병원비로 허리가 휘는 부모.
그런 부모의 입장을 현실로 자각하고 있는 아이들.
그래서 착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환경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하지만 아이를 자식으로만 바라보던 엄마의 한계는
환경에 순종하기만 하던 선의 인내에도 한계가 왔음을 포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선은 자신의 남동생이 유치원에서 자주 맞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화를 느낀다.
게다가 늘 같은 녀석에게 맞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어눌한 자신을 닮아 있다고 생각하자
엉뚱한 대상,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향해 화를 쌓기 시작한다.


어느 날 집에서 동생과 놀던 그 아이가 어김없이 그날도 동생을 때리는 상황에 직면하자
인내의 한계점을 폭력성으로 드러내게 된다.

 

아이를 때린 누나 선은 엄마에게 혼날까 마음 조리지만
맞고 있는 동생을 가만히 보고 있을 누나가 어디 있냐며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엄마.

그때 어딘지 모르게 선은 묘한 기분을 느낀다.

엄마 역시 그 아이의 엄마에게 이렇다 하게 제대로 된 항의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폭력성은 그렇게 훈훈하게 포장된다.

 

 


 

 

학교는 교내에서 벌어진 폭력이나 폭언 사건을 감지하려는 노력이 없다.
집단 왕따를 선생이 모르지 않으며 더구나 폭력사건은 가시적인 현상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처벌이 미비하거나 묵인해 버리고
경찰 역시 암암리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합의를 권할 뿐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폭행사건은 과시욕이 죄의식을 넘어섰기 때문에 발생된 사건이라고 한다.

과시욕이 죄의식을 넘어선 이유.
우리는 그 이유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닐까.

 

 


 

 

선은 왼쪽 눈 언저리가 다홍빛으로 물든 동생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너 왜 계속 연호랑 놀아?"
"응?"
"아니... 연호가 너 계속 다치게 하잖아. 맨날 상처 내고 때리고 장난도 너무 심하고."
"이번엔 나도 같이 때렸는데?"
"그래?"
"응. 연호가 나 때려서 나도 쫓아가서 연호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연호가 다시 나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같이 놀았어."
"놀았다고?"
"어"
"야,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떻게 해!"
"그럼 어떻게 해?"
"다시 때렸어야지!"
"또?"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너도 때렸어야지."
.

.

.
.

 

"그럼 언제 놀아?"
"어?"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

 

 


 

아마 영화가 말하는 우리란 놀 줄 아는 우리를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운 관계 맺기는 같이 노는 것이다.

선과 지아도 함께 놀면서 친구의 관계를 맺는다.

 

더 이상 놀지 못하는 아이들.
노는 방법을 모르는 어른들.

노는 게 뭔지 모르는 사회.

 

그래서 관계 맺기가 뭔지 모르는 우리들.

 

 

사회 문제의 대부분은 바로 놀이문화의 복귀에 있을지도 모른다.

 

 

 

놀이의 감각에 성별의 차가 있을 수도 있다.

안정을 기반으로 하는 여자의 호르몬과 불안함을 해소해야만 하는 남자의 호르몬이 본성적인 놀이 감각의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남녀를 차이 나게 바라볼 이유는 없다고 본다.

어느 순간 어떤 형태로 놀이 감각이 뚫릴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p.s.

 

나 역시 초등학교 5학년 아주 한정된 기간(2학기 3개월) 동안 왕따를 당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오랜 기간 왕따를 당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놀림을 받거나 폭행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나와 친했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와한 마디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왕따사건을 누군가의 일시적인 이간질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 정도로 떠올린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그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전학생 김은희였다.
같은 반에 김은희라는 키 큰 친구가 있어서 반사적으로 작은 은희라는 별명을 갖게 된 전학생이다.

집도 가까워서 1학기 내내 붙어 다니고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며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하지만 길순이의 이간질에 가장 먼저 내게 등을 돌린 건 바로 은희였다.

 

길순이의 공개사과가 있은 후 6학년이 되었지만 은희와 나는 서로 다른 반에 배정되었고
가끔 복도를 오가며 마주칠 때면 어색한 모습으로 스쳐 지날 뿐이었다.

 

영화에서 처럼 서로가 서로를 할퀴는 밑바닥까지 보이거나 보여주진 않았지만

은희가 길순이와 무슨 얘길 어디까지 어떻게 했을지 모를 일이었고 나와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가장 먼저 등을 돌렸다는 사실에 솔직히 마주치는 것도 싫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이미 내 안에서 다시 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는 우리는 같은 우리가 아닐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 말하는 '우리'라는 말은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인간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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