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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with ... 영화

텐저린즈 :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2013)

by story-opener 2020. 10. 18.

Tangerines, Mandariinid

 

드라마/전쟁
에스토니아, 조지아
86분, 12세이상관람가
(감독) 자자 우루샤제
(주연) 렘비트 울프삭, 기오르기 나카시드즈, 엘모 누가넨, 미샤 메스키

 

 

 

 

 

 

텐저린즈는 한국말로 귤(또는 귤농장)을 의미한다.

영화는 귤농장에서 벌어진 내전의 한 장면을 근간으로 전쟁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귤농장이라는 휴전지대 안에서

아군과 적군의 개념이 뒤섞이는 관계 속에서

영화는 전쟁의 무의미를 강조한다.

 

인류의 전쟁은 대부분 인종전쟁이다.

민족주의를 근간으로하는 인종전쟁.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레임일 뿐 그 속내는 전혀 다른 색을 띄고 있다.

 

 

 


 

 

소련(소비에트 연방) 붕괴

흑해

1992~1993년 내전

 

 

1991년 12월 8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인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자 수 많은 민족국가들이 생겼다.

흑해 연안의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도 그런 나라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이 곳 역시 내부에서 민족문제가 발생한다.

 

조지아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중에서 압하스(ABKHAZIA),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아자리아(AJARIA)가 조지아로부터 분리되길 원했고 그런 조지아 내전이 압하스 전쟁(1992~1993년)이다. 이때 러시아는 압하스와 연합하여 조지아를 공격한다.

 

 

한편 압하스 지역엔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에 있는 발트해 연안의 작은 국가로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했지만
결국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 독립된 국가다.

 

19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에스토니아 사람들 중 일부가 코카서스 산맥 근처로 이주한 적이 있었는데

조지아의 압하스도 그 중 한 지역이다.

 

 

 

 


 

 

 

소련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독립한 국가들의 민족전쟁 중의 하나로 조지아와 압하스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다.
이때 조지아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니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

압하스에 살던 에스토니아인들은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목수로 살던 노인 이보(렘비트 울프삭)와 텐저린 농장 주인인 마르구스(엘모 누가넨)는 탠저린을 수확하기위해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다. 함께 살던 주민들이 대부분 이주했으니 더이상 목수로 살아갈 수 없던 이보는 마르구스에게 필요한 탠저린을 담을 나무 상자를 만들기로 한다.

 

 

압하스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지만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듯 평정을 잃지 않고 탠저린 수확에 정성을 쏟는 두 사람.

 

 

 

 

결국 전투가 두 사람의 마당 앞까지 정복하며 치열하게 벌어지던 그 때,

 

돈이 필요해서 압하스의 용병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 체첸인 아메드(기오르기 나카쉬제)와 조지아인인 니코(미하일 메스키)가 중상을 입고 이보 집 앞에 쓰러진다.

 

 

 

영화는 그렇게 두 명의 군인이 이보를 찾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보는 서로 앙숙이 되어 싸우는 두 사람을 자기 집 안에 들여 놓고 극진히 간호를 해주지만

치료를 받고 있는 아메드와 니코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몸만 나으면 서로 죽이겠다며 상대를 협박하기 바쁘다.
아메드는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니코도 이에 맞서 아메드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정작 니코는 전직 배우였던 기질때문인지 용병인 아메드보다는 호전적이지는 않았다.

 

 

 

반면에 두 사람의 적의와 증오를 바라보면서도 연민의 정을 담아 그들을 돌보는 이보는 이성적으로 그들을 설득해가며 중재자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긴장감 속에서 이보가 그런 이성적이고 차분한 설득력을 갖게 되기까진 아들을 잃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보에게 전쟁은 아들을 빼앗아 간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악한 것이기도 했다.
전쟁 속에서 증오를 극대화시키는 군인들의 모습은 인간이 이성을 잃고 가장 바보스러워질 때 드러나는 멍청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이보의 모습에서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메세지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군인들은 어째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지 그 이면을 드러다본다면 그들이 이성을 잃게 되는 게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도 말하고 있다. 돈이 필요해서 용병이 된 아메드나 니코가 결코 군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의 본질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 직면한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텐저린 농장 주인인 마르구스를 떠올리게 된다.

 

 


 

 

 

이보의 집안에서 그의 보호 속에 두 사람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둘 간의 적대감도 조금씩 사그라 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새로운 식구처럼 서로의 관계도 회복되며 내면에 깊이 잠재해 있던 인간성을 찾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총격전이 이 마을을 덮치자 어제의 적이었던 그들은 오늘의 동지가 되어 전쟁을 함께 하게 된다.

 

 

이제 그들에게 적은 지금의 평화를 깨려는 외부의 저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적대감이 사라진 이유는 함께 한 식탁에서 같은 끼니를 나눈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함께 먹고 사는 관계로 인연이 된 그들은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
전쟁 통에 팔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텐저린을 모두 수확하고 싶어했던 농부 마르구스는 압하스 군의 총에 죽는다.
니코도 총격전 중에 목숨을 잃게되고 살아남은 건 이보와 아메드 뿐이다.

이보는 나무 상자대신 두 사람의 관을 만들고, 아메드와 함께 그들을 땅에 묻는다.

 

니코를 묻는 곳은 이보의 아들이 묻힌 무덤 옆.
그의 아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겠다고 압하스 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도 아니라는 이보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쟁에서 참가한 댓가는 헛된 죽음이었다.
그리고 역시 헛된 죽음을 맞은 조지아 군의 병사 니코를 묻는다.

 

 

 

 

 


 

 

 

 

에스토니아의 근현대사를 드려다보면 이보와 그의 아들의 입장이 서로 다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에스토니아는 중세시대부터 덴마크와 독일,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등 주변 강국들의 식민지 역사를 반복 해왔기 때문에 20세기에도 이어진 그 역사를 몸으로 겪은 이보와 소비에트 연방국 안에서 독립을 외치는 이보의 아들은 전쟁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1918년에 유럽강대국들로부터 독립하지만 곧이어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고
1차세계대전 독일의 패전으로 인해 같은해 에스토니아 임시정부를 세우지만 러시아의 침공을 받게 되고 
이를 막아낸 후에도 강대국간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1940년부터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다.
그리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하게 된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리적 상황때문에 끊임없이 누군가의 소유물로 식민지화 됐던 에스토니아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야말로 암울한 시간들 뿐이다. 그저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혹은 그들의 명분에 의해 거래되는 식민지 노예처럼 그런 약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보는 쉽게 무너질 약한 노인이 아니다.

어두운 민족사 속에서 무수히 희생된 약자들을 바라보며 그가 깨달은 건 단 하나일 것이다.

그 어떤 전쟁도 약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 모든 전쟁은 약자를 희생시킬 뿐이라는 것.

이게 전쟁의 본질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보는 결코 전쟁에 휩싸인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어떤 증오도 편견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이보는 전쟁이란 그저 무의미한 약자의 희생만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목수이다. 어쩌면 이보가 목수인 이유도 다양하게 해석 할 수 있겠지만 혹자는 예수를 상징한다고도 하지만 내가 이해하게 된 목수 이보는 자신의 목공기술과 도구를 사람을 희생시키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목숨이 다한 그들의 안식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보가 이 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전쟁 속에서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보는 서로를 향한 미움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심어진 것인지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희망까지도 만들어내지만 결국 그가 이곳에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니코의 관을 짜고 그의 시신을 아들의 옆에 묻어주는 것이다.

 

태어나서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식민지시대를 버티며 생명력을 지켰다는 건 그만큼 삶을 향한 의지와 자신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가 관객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한 가지가 아니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삶은 집착을 버릴때 비로소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의 내전은 민족주의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붕괴로

냉전의 시대를 종식시켰다고는 하나 독재정치에 반발한 테러가 있었고

결국 테러를 지원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또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붕괴된 소련과 그 이후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미국근현대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냉전의 시대가 자본주의의 패권 장악을 위한 행보였다면

냉전 이후 밀레니엄까지의 시대는 자본주의의 무한증식 시대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귤 농장.

그건 자본주의의 생존을 의미한다.

농장주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망할지 망하지 않을지에 모든 집중이 쏠려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흥망성쇄가 더 중요하다는 건 그만큼의 탐욕이 자리잡고 있음을 누구보다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먹고 사는 고통이 크기 때문에 이번 수확을 놓치게 되면 결국 굶어 죽으나 지금 죽으나 별반 다를게 없는 빈곤직전의 가난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오랜기간의 전쟁 속에서 곯은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죽어간 자들을 잊지 못하기때문일 수도 있다.

 

이보를 찾아 온 두명의 군인도 이보의 집을 휴전과 안전과 휴식으로 인식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먹고 잠자고 치료받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성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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