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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with ... 책

004. 일본이 잃어버린 자본주의를 찾아서, 태엽감는 새

by story-opener 2020. 9. 8.

 

 

 

 

 

 

어딘가에 가게를 하나 내려고 한다 치자.

레스토랑이든 바든, 무엇이든 좋아. 자, 상상해 봐.

지금 네가 어딘가에 가게를 내려고 하는 거야. 몇 군데 장소의 선택이 가능해.

그러나 어딘가 한곳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이해타산을 따져 보겠죠.

그 장소라면 가게 세가 얼마고 빌릴 돈이 얼마니까 다달이 얼마씩 갚아 나가고, 자리는 몇 석이나 되며,

회전 수는 얼마 정도고, 손님당 단가는 얼마며, 인건비는 얼마 정도인가 계산하여 손익 분기점을 따져 보겠죠.

그런거 아닌가요?

 

 

" 그런 걸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하는 거야.

내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나는 어떤 장소가 좋다고 생각되면 그 장소 앞에 서서 하루에 세 시간이든 네 시간이든,

그리고 며칠이 걸리든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의 얼굴을 단지 줄곧 바라본단다.

아무 생각 안해도 좋아. 아무것도 계산할 필요 없어.

 

어떤 인간이 어떤 얼굴을 하고 거기를 지나가는가를 보기만 하면 돼. 우선 적어도 1주일 정도는 걸린다고 봐야지.

그사이 최소한 3천에서 4천 명 정도의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좀더 시간이 걸릴 때도 있어.

그러나 그사이에 자연히 알게 돼. 갑자기 안개가 걷히듯이 알게 되는 거야.

 

거기가 도대체 어떤 장소인가를.

그리고 그 장소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가를.

 

만약 그 장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정반대라면 그곳은 그것으로 끝장이지.

그러면 다른 곳에 가서 같은 행동을 또 반복해 보는 거야.

 

그래서 만약 그 장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공통점 내지 타협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의 꼬리를 잡은 것과 마찬가지야.

그후에는 그것을 단단히 잡은채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만 하면 돼.

 

그러나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바보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기에 서서 자신의 눈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끈질기게 보지 않으면 안되지.

계산 따위는 나중에도 얼마든지 가능해. 나는 있지, 어느 쪽인가 하면 현실적인 인간이거든.

내 두 눈으로 직접 납득할 때까지 본 것 외에는 믿을 수 없어.

 

핑계나 계산은, 혹은 무슨무슨 주의나 무슨무슨 이론이라는 것은 대개 자신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그리고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해.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어.

하려고만 생각하면 누구라도 가능할텐데 말야."

 

 

 


 

 

나는 네가 구미코와 결혼 한 결혼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늘 생각해 왔고, 구미코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왜 이런식으로 갑자기 틀어져 버렸는지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가 안 가. 너 자신도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않겠지?

 

이해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무엇인지 확실히 알 때까지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훈련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시간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돼. 충분히 무언가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세련된 형태의 복수란다.

 

 

 


 

 

오카다 씨도 아시는 바와 같이 여기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세계입니다.

강해지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어떤 작은 소리도 흘려 보내지 않도록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시겠어요? 좋은 뉴스는 대부분의 경우 작은 목소리로 말해집니다. 부디 그것을 기억해 주세요.

부디 당신의 태엽이 발견되면 좋겠어요. 태엽 감는 새님.

 

 


 

 

그때까지 통용되던 가치관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된 시대며,

어디에서도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찾을 수 없게 된 채 모든 것이 유동적으로 된 시대.

이런 가운데 '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것을 자각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태엽 감는 새가 만약 정말로 없어졌다면 누군가가 태엽 감는 새의 역할을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군가 태엽 감는 새 대신 세상의 태엽을 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의 태엽은 점점 풀려서 정지해 버리게 된다.

그렇지만 태엽 감는 새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느냐고 나에게 묻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요, 조사할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조사 방법만 알고 있으면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 꼭두각시 회사 뒤에 버티고 있는지도 대강 짐작이 갑니다. (.......)

그 정도로 꼼곰하게 일을 했더군요. 프로의 솜씨였어요. 하지만 덕분에 지금은 여러 가지 사실을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고 있는 사람은 오카다 씨, 오히려 당신이더군요. 당신은 자신이 도대체 누구에게 돈을 갚고 있는지 모르고 있겠지요?

 

돈에는 이름이 없으니까요.

 

분명히 그 말이 맞습니다. 표현이 멋있군요. 돈에는 분명히 이름이 없습니다. 명언이군요. 수첩에 적어 두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카다씨, 모든 일은 좀처럼 그렇게 순조롭게만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가령 세무서라는 곳은 그 정도로 대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름이 있는 곳에서만 세금을 받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는 곳에도 억지로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이름은 물론 번호까지 붙여 버립니다. 정말이지 정서고 나발이고 없다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 요소입니다.

 

..... 그런 연유로 내가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돈에는 모두 훌륭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건 여기서니까 하는 말인데요, 나는 사실 오카다 씨에 대해서 상당히 감탄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비행기를 태우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뭣하지만 오카다 씨는 아무리 봐도 그저 보통 사람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별로 쓸모가 없다고나 할까요?

미안하지만 이런 표현을 쓴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오카다 씨, 이것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쓰러지는 법입니다.

쓰러지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두 다리로 서서 걷고, 걸으면서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보면 바로 얼마 전의 일입니다.

이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오카다 씨가 관계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쓰러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튼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고, 골치 아픈 일이 많기 때문에 성립된 세계니까요. (.........)

 

이 세계에서는 아마추어든 베테랑이든 모두 주르르 미끌어지고, 튼튼한 사람도 허약한 사람도 똑같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위해서 모두 보험을 한두 개쯤 들어 두고 있죠.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두면 설사 쓰러져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혼자뿐이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한 번만 쓰러져도 그것으로 아웃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이지요. (.......)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요, 모든 일에는 물러날 때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나와 와타야 선생님은 실력도 다르고 출신도, 머리도 다르지요.
농담으로 비교하기도 실례가 될 정도로 다릅니다.
하지만,하지만 말이지요, 슬쩍 한 꺼풀만 벗기면 우리는 대체로 그 놈이 그 놈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햇빛이 드는 곳에서 양산을 펴듯이 단번에 알았습니다.


얼씨구, 이 남자는 겉으로는 인텔리 도련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형편없는 놈이구나, 엉뚱한 녀석이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야 뭐, 엉뚱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정치의 세계란 말입니다, 오카다 씨, 일종의 연금술이에요.
나는 형편없는 저속한 욕망이 아주 훌륭한 결과를 낳는 예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또, 그 반대의 예도 얼마든지 보아 왔구요.

다시 말해 고결한 대의(大義) 비슷한 것이 썩어빠진 결과를 낳는 것도 봤습니다.
솔직히 그렇다고해서 어느쪽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와타야 노보루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면 뭣하지만 내 눈으로 봐도 아주 별종의 형편없는 사람이라서 말이에요.
그 사람 앞에 나가면 내 비열함이 왜소한 원숭이처럼 보였어요. 이건 도저히 못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건 비슷한 사람끼리는 순간적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답니다.


상스러운 표현이라 미안하지만 말이지요, 자지의 크기와 마찬가지지요. 큰 놈은 크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오카다씨, 한 인간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어떠한 미움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말이지요, 내가 열렬히 갈망하는데도 못 얻는 걸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쟁취하는 녀석을 볼 때입니다.
내가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세계에, 얼굴 하나로 어렵지 않게 들어가는 녀석을 손가락을 빨며 보고 있을 때랍니다.
상대방이 주변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증오심은 더해지지요. 그런 겁니다.


나에게 그런 증오심을 심어 준 사람이 바로 와타야 선생님이었던 겁니다. 본인은 이런 말을 들으면 깜작 놀랄지도 모르지만요.
어때요, 오카다 씨는 그런 증오심 비슷한 걸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학생 시절에 몰래 숨어서 마르크스의 저서를 몇 권 읽었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본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새삼스레 거기에 빠지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던 거요.


내가 속해 있는 부서와 정보부와의 관계로, 스탈린과 그 괴뢰의 독재자가 몽고에서
얼마나 피로 얼룩진 압제를 가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들은 혁명 이후 몇만이나 되는 라마승과 지주들을,

그리고 반대 세력을 수용소로 보내어 냉혹하게 말살했는지 모르오.
그와 똑같은 일이 소련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소.


나는 설사 사상 그 자체는 믿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상이나 대의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나 조직은 이미 믿을 수가 없었소.
그것은 우리 일본인이 만주에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오.


하이라얼의 비밀 요새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또 그 설계의 비밀을 입막음하기 위해서,

얼마나 엄청난 수의 중국인 노동자가 살해되었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요.


그리고 또 나는, 러시아 인 장교와 몽고인이 가죽을 벗기는 지옥과도 같은광경을 목격하고 그 뒤에 몽고의 깊은 우물 속에 처넣어져 선명하고 강렬한 빛 속에서 살아갈 정열을 한 조각도 남김없이 잃어버렸던 거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상이나 정치 따위를 믿을 수 있겠소.

 

 

 


 

 

 

그 탄광은 중요한 전략 시설로서 당 중앙에서 파견된 국원(局員)이 지도하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소.
그곳의 최고 책임자인 정치 국원은 스탈린과 같은 고향 출신이었는데, 아직 젊고 얏미에 차 있는 데다가 냉혹하고 엄격한 인간이었소.
그는 탄광 산출량의 숫자를 올리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했소.
그는 노동자의 인적 소모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소.


산출량의 숫자가 올라가면 당 중앙은 그 곳을 우량 탄광으로 인정하고 그 보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우선적으로 배정해 주었소.
그러므로 설사 많은 수의 사망자가 나오더라도 얼마든지 충원이 되는 셈이었소.
그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보통은 손을 대지 않는 위험한 광맥을 차례로 파 나갔소.
당연히 사고의 빈도는 더욱 잦아졌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소.

 

냉혹한 것은 상부 사람뿐만이 아니었소.
현장의 간수들 대부분은 그들 자신이 죄수 출신인 데다가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무식하고 기가 질릴 정도로 집념이 강하고 잔인했다오.
동정심이나 인정 따위는 그들에게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소.


땅 끝과 같은 시베리아의 한기가 오랜 시간에 걸쳐 그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소.
그들은 어딘가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오랜 징역살이를 한 사람들인데,
이제는 새삼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으니까 거기서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어 시베리아 땅에 자리잡아 버린 거요.

 

 

 

 


 

 


'그것은 내가 오빠인 와타야 노보루를 죽여야만 한다는 거예요.'

 

(.....)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훨씬 전에 제정신을잃어버렸을 거예요.
나는 자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완전히 내주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데까지 떨어졌겠죠.
오빠는 그와 똑같은 짓을 오래 전에 언니에게 저질렀고 그래서 언니는 자살했어요.


그는 우리를 더럽혔던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육체적으로 더렵혔던 건 아니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더럽혔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자유를 빼앗긴 채 어두운 방안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족쇄가 채워져 있었던 것도, 누가 지키고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거기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어요. 오빠는 그 보다 더 강한 사슬과 감시로 나를 옭아매놓고 있었던 거예요.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죠.


나 자신이 내 발을 옭아매는 족쇄였고, 잠도 자지 않는 무서운 감시관이었어요.

물론 내 속에는 거기서 빠져 나가고 싶어하는 내가 있었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빠져 나갈 이유가 없다고 체념하고 있는 겁 많은 또 하나의 내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빠져 나가고 싶어하는 나는 도저히 또 하나의 나를 극복할 수가 없었죠.


빠져 나가고 싶어하는 내가 힘을 가질 수 없었던 건 내 마음과 육체가 이미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빠져 나가서 다시 한 번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게는 이미 없었던 거죠.

나는 오빠로 인해서만 더럽혀져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나는 그 이전에 스스로도 자신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더럽혀져 있었던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보낸 편지에 어떤 남자와 잤다고 썼었죠.


하지만 그편지의 내용은 진실이 아니에요. 나는 여기서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내가 잔 상대는 단 한 사람만이 아니에요. 나는 수 많은 다른 남자와 잤어요. 셀 수 없을 정도라고요.
도대체 무엇이 나에게 그런 짓을 하게 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어도.
이제와서 생각하면 오빠의 영향력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가 내 속에 있는 서랍 같은 걸 멋대로 열고, 거기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뭔가를 멋대로 끄집어내 나를 다른 남자들과 한없이 관계를
맺도록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빠에게는 그런 힘이 있고, 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두사람은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거든요.


어쨌든 오빠가 나한테 왔을 때 이미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 자신을 더럽히고 있었어요.
심지어 성병에까지 걸렸지요. 하지만 나는 편지에 썼듯이 그런 와중에도 당신에게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가질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그걸 지극히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그런 일을 저지른 건 진짜 내가 아니었나 봐요. 그렇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는 걸로 쉽게 끝나는 걸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진짜 나는 어떤 나일까요?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할 정당한 근거가 있을까요?


나는 나라는 사실을 그다지 확신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죠.

 

 

 

 


 

 


혼자서 버스를 타고 산속의 공장으로 돌아가는 파란 털모자를 쓴 가사하라 메이의 모습과
어딘가의 풀숲 그늘에서 자고 있을 집오리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 내가 돌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안녕, 가사하라 메이"라고 나는 말했다. 안녕, 가사하라 메이.


나는 뭔가가 너를 굳건히 지켜 주길 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조용히 잠깐 잠에 빠졌다.

 

(end)

 


 

 

 

 

 

태엽 감는 새


1. 작은 삶 큰 의미

2. 욕망의 뿌리

3. 나는 누구인가

4. 사람은 누구나 태엽 감는 새

 

 

 

어째서 일본이나 한국은 무라카미에 열광할까?

그리고 일본과 한국은 동시대에 같은 이유로 열광하는 걸까?

 

각자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베스트가 되었던 이유와

한국에서 베스트가 되었던 이유는 다르지 않을까?

 

동시대라고 하지만 엄연히 처해있는 정치경제적 상황은 다를테니 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일본의 입장에서 해석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와 주제에 국한된 설명을 강요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무라카미가 내민 상실과 허무와 방황이라는 키워드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 당시 잃어버린 20년을 향해 가고 있는 일본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실과 허무와 방황이 이해되지만,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무라카미라는 이름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고하는 작가가 등장한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과연 대한민국도 그런 상황이었을까?

 

 


우리 모두가 태엽 감는 새라고 말하고 있는 이 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가 신용창조를 해야 하는

개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게다가 모든 것의 근원 (가치 판단의 기준이며, 시스템의 기준)이라 해석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의 상실을 논하는 이 책에 열광한 그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의아할 따름이지만 그것 역시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2013년을 전후로

인문학에 열광한 대한민국.

그때나 지금이나 열광의 중심에 한국여성 노동자가

그 기반을 받쳐들고 있다.

 

 

이 책이 한국에 들어와 열 번을 넘게 제판되던

1994년~1997년은 정확히 IMF가 터지기 직전 더할나위 없는 문화파티를 향유하던 상황이다.

국내에 외채가 늘고 있던 시기다.

 

반면 일본은 저성장 시대 속에 허우적대며 집안의 가장들이 주머니에 움켜쥐던 자본력을 상실당하는 시기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그 덕에 원인도 모를 개인의 소득이 점차 확장되고,

그 혜택이 직장여성들에게까지 흘러들기 시작할 무렵이다.

 

마찬가지로 2011년~2014년에도

환율에 의한 통화유입량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고 있던 시기.

 

국외에서는 거품붕괴로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국내는 쥐새끼가 갉아 먹고 남은 곳간 열쇠를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봉사 삼년의

병신년 며느리가 주어가도 곳간은 풍년이겠지 하며

눈가리고 아웅하던 시기다.

 

그렇게 외채가 늘어가고 있던 1994년~97년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메인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빚으로 누리게 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지적 풍요에 빠지기 시작하던 그 시대에 대한민국은

어떤 상실과 허무를 느끼고 있던 걸까?

정말 상실과 허무가 있기는 했던 걸까?

 

허무가 있다 한들 그것이 과연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한 허무였을까?

그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직시할때 맞닥뜨려야 할 허무함이지 않았을까?

그렇기때문에 오히려 일본에서 베스트가 되었다는 것에 더 큰 환호가 있었던 건 아닐까?

허무개그마저 유행처럼 등장했다 사라진 이유는 뭘까?

 

소비문화가 정착하는 시기에 생겨나는 소모품 같은 유행.

한국은 유행천국인 건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1988년,

그 해는 대한민국 첫 번째 흥분기였다.

 

전국민이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88서울올림픽'이 있던

그 해 일본은 상실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은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일본의 입장을 한국은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하며 무라카미에 열광했던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독자는 대부분 20~30대 여성으로 분류되고 있다.

1994년~1997년 처음으로 사회 노동자가 된 한국여성들의 경제활동은 98년 IMF와 함께 급격히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남성 노동자에 비해 저렴한 노동비를 표방하는 여성 노동자.

 

자본주의는

노동에 많은 비용을 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건 어떤 음모론도 아니고, 그저 자본의 특성일 뿐이다.

자본은 노동비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 가장 저렴한 노동 유지비로

효율적인 자본확장이 보장되는 여성(성별구분시) 노동자는

그만큼 매력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역시 주어진 노동이 고도의 테크닉이나 정보활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충분히 대체 가능한 인력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과연 한국여성 20~30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부분에 매료되어 열광했던 건지 의문이 생긴다.


과거에 비해 경제력이 생긴 한국여성들의 소비력을 바탕으로 한국에 흘러들어온 무수히 많은 소비문화와 별반 달라보이지

않기때문이다.


1996년 무리하게 추진된 OECD국가 가입은 마치 한국이 선진국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고,

더불어 외채가 늘어나며 국내 통화량이 급증하기 시작하자 의도치 않은 낙수효과로 대학이라는 문턱을 넘게 되는 지적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조금씩 경제력을 갖기 시작한 한국 여성들 사이에는

진심으로 지적 목마름을 채워줄 문학이 필요했던 상황 속에서

국내에는 어설픈 문화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하고

사이비 지식인들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다.


경제적인 통화량의 급증이

여성들 사이에서 지식인과 사이비를 새롭게 등장시켰다면,

두 부류 가운데 어떤 부류가 더 확고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존여부도 결정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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