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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 생존법칙에만 의존하는 경영

by story-opener 2020. 11. 17.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경영.

그런 경영이 있을까?

 

착취를 하지 않는 경영.

그게 경영일까?

 

 

 

생명이 태어나 숨 쉬는 그 순간부터 생명은 모든 걸 착취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다.

생명체가 그 속에 에너지를 축척하는 것도 이윤을 남기는 거다.

이윤이 없으면 생존은 생각 할 수 없다.

이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여기까지가 자연의 이치다.

문제는 가치라는 개념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자연에서는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그 어떤 생명도 가치의 정도를 부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를 따지는 건 유일하게 인간 뿐이다.

 

그건 단순히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존재라는 걸 넘어

그 이상으로 관계를 발전시켜가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인간의 무리 속에서는 자연과 달리

가치에 따른 이윤과 착취가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윤과 착취의 본질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제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그 역시 자연에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이윤을 위해 착취가 존재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이치이지만

인위적인 세상이기때문에 그 착취를 조율하는 마음이 생긴 것 뿐이고 그 마음이 곧 경영이라고 생각한다면

착취가 없는 경영, 이윤을 내지 않는 경영이라는 그 말은 어패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의 목적은 이윤에 있고, 결국 생존력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생명력을 위해서라면


이윤을 위해선 착취가 필수조건이라는 걸 수용해야 한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발전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이윤과 착취를 악의 무리로 치부해 버린다면 생존은 포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단순히 암수의 순애보로 탄생되고 유지되는 게 아니다.

생명은 이윤과 착취로 탄생하고 유지된다.

 

 

자연을 떠나 인위적인 세상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경제적인 이윤이 될 것이냐, 잉여가 될 것이냐의 차이이고

주체적으로 착취 할 것이냐, 착취 당할 것이냐의 차이에 있다.

 

언제나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라고만 한다.

노동자가 정말 착취의 대상이기만 할까?

노동자는 착취하는 게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자본과 노동이 교환의 대상으로 비교 될 수 있는 걸까?

 

이 세상에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말도 어패가 있다.

노동을 할 기회가 없다면 그 노동은 무슨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까?

 

가치있는 노동.

그 가치를 누가 정하는 것일까?

 

그건 만든자가 가치를 부여하는 걸까?

아니면 소비하는 자가 부여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필요로 하는 자가 부여하는 걸까?

 

 

한 단위의 노동

그 노동의 가치

과연 그 기준을 누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 걸까?


그저 시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혹은 욕망에 의해 가치 기준이 설정 된다고 누군가가 정리 하고

그 정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뒤집어 지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노동의 가치라는 개념을

동네 북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게 내버려 두는건 정작 노동자 스스로라는 생각이 든다.

 

 

 

 

이윤이라는 목표가 없다면 가치 부여는 기준을 상실하게 된다.

더불어 착취도 가치 부여의 기준에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거부하고 시작한다는 건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자본주의 속에서 이윤과 착취를 논 할 자격은 자본을 소유한 쪽에 있다.

이윤에 대한 권리는 노동자에게 있지 않다.

이유는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에 의해 생겨난 이윤은 자본의 소유이지 노동의 대가로 분배될 몫이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노동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기계설비(자본)의 대체가 운명이었다는 걸 이해하게 해준다.

노동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자본과 노동이 함께 공유 해야 할 문제라는 것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 그 자체가 이윤과 착취의 시작이라는 걸 수용하고 시작해야 할 문제다.

더불어 생명이 태어나는 이유가 순환에 있다는 걸 이해한다면 이윤과 착취는 순환에 맞춰 조율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결국 생명은 다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 이치는 세상 어떤 존재도 거부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면 어차피 사라질 건데 왜 생긴 걸까?

어쩌면 또 다른 순환을 이어주기 위해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나타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경영도 순환에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것,

착취를 하지 않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순환을 위해 이윤을 돌려주고 다시 돌려받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

그 고리 속에서 착취의 역할을 긍정적 이윤 발생으로 부여하는 것.

 

이제 노동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착취의 입장이 아닌,

경영의 입장으로 확장시켜 생각해야 할 시기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가 뭔지 헤아려 보려면 그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시끄럽게 들썩이며 세상이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듣지 않는다면 태어난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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