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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with ... 인물

다시 쓰는, 동주 (2015) - 비극을 시대정신으로 극복한 시인

by story-opener 2020. 11. 2.

DONGJU : The Portrait of A Poet


드라마
한국
2016.02.17 개봉 110분,
12세 이상 관람가

 

(감독) 이준익
(주연) 강하늘, 박정민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 시대.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 동주와 몽규.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두 사람.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암흑의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윤동주 & 송몽규

 

이런 시대에 살면서 시를 쓰길 바라고 시인이 되길 꿈꿨다는 게 부끄러워서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펼치지 못한 게 원통해서

젊음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두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1943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취조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한 마을에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바꾸는 것에 대한 논쟁으로 이야기는 출발한다.

 


한 남자가 신학교를 인민학교로 바꾸는 것에대해 반대를 주장하고 있지만 주민들도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걸 주장한다.

 

"교회가 우릴 지켜주는 시대가 아이야, 까놓고 왜놈들이 미국이라고 무서워하겠냐고!"

 

더 이상 교회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걸 지켜보던 몽규는 동주에게 묻는다.

 

"야, 동주야. 신앙이 뭐이 저래 중요하니. 아니, 온 세계 인민이 계급도 차별도 없이 사는 게 중요하지."
"야, 니, 공산주의자 같다."
"아버지나 내나 저 신앙의 의지가 안되나 부지, 뭐."
"그래도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마을이 이까지 버텨온 거 아이겠니."
"그래, 그라믄 계속 견뎌라 니는."

 

 

그리고 주민들을 향해 뛰어드는 몽규.

 

 


몽규는 우리가 언제까지 핍박을 받아야 하냐며 신앙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학교는 세계 변화의 흐름에 맞춰 온 세계 인민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고는 뒤쫓아오는 아버지를 피해 멀리 도망가는 몽규와 그 뒤를 무작정 따라 뛰어가는 동주.

몽규를 따라가며 동주는 묻는다.

 

 

"니, 급 시래 사람들 앞에 연설은 왜 한 거이가?"
"세상이 변하고 있잖니!"
"세상은 변해도 신앙은 변하지 않아!"

 


몽규는 급진적인 개혁자였고, 동주는 점진적인 개혁자였다.
영화는 두 실존인물이 서로 얼마나 달랐는지 보여주면서도 서로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한다는 걸 보여주고 예나 지금이나 개혁이라는 물결 속에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두 인물이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세상이 변해도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는 동주의 말은 결국 신앙을 빌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신앙의 본질은 현실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저항정신에 있기에 그 정신을 드러내는 창작을 향한 인간의 노력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세상이 어떤 형태로 변하든 그 시대를 계속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저항정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 속에는 일상의 소소함 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과 현실의 간격에 개탄스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그래서 고군 분하는 자신의 노력에 쓸쓸하고 외로워지는 고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동주와 달리 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더라도 더 이상 잡힐 것도 없는 가난한 현실과 그 속에서도
먹고살 궁리는 뒷전인 무능한 가장을 비난하는 듯한 뉘앙스를 담아낼 정도로 지극히 현실적이며 적극적인 행동파임을 드러낸다.


'우리 부부는 인젠 굶을 도리밖에 없었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 이상 잡혀 먹을 것도 없었다.
-아, 여보. 어디 좀 나가봐요'

라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1934년 12월 은진중학교 삼 학년생 송한범이란 아명으로 신춘문예 콩트 부분에 당선된 작품이다.

 


-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달리 돈이 생길 길이 없자 아내를 꼬드겨 장인에게서 받은 마지막 결혼예물인 은수저를 저당 잡아 돈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이것저것 사서 귀가한 남편이 뱃속 채울 생각에 아내가 은수저 대신 밥을 먹을 다른 수저를 사 오지 않아 결국 아내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된 그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빈곤한 상황 속에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쉽게 돈을 얻을 궁리만 하는 남편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아내는 누굴 의미하고 남편은 누굴 의미하는지, 그리고 은수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그 이면에 숨은 뜻도 되새길 수 있는 것 같다.

 

결국 모든 걸 빼앗기고 맨 손으로 눈앞에 놓인 밥상만 멀뚱하게 바라보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두운 현실에 위트를 겸하고 있어 읽는 이에게 씁쓸한 미소를 띠게 만든다. 이런 암흑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미소를 만들어 낸 그가 만약 계속 글을 썼다면 문학사에 어떤 획을 그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몽규는 주권을 되찾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떠나지만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파벌싸움과
독립군이라고 생각하던 이웅의 이중적 행동을 비롯해 민족을 살상하는 공산당의 횡포에 실망하고 결국 고향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동주와 함께 연희전문대학으로 진학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기도 한 윤동주의 대학시절 회상 장면은 영화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핵심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안타까워하는지..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장면은 형무소에서 벗어나 문예지를 만들기 위해 모여 앉아 있던 그 시절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공존해 오던 동주와 몽규의 의견충돌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시는 동주것 말고는 실을만한 게 없어."
"자기 생각 펼치기에는 산문이 좋디. 시는 가급적 빼라. 인민을 나약한 감성주의자로 만드는 거이 문학아이라."
"이거는 필력이 있긴 한데 이광수 선생 작품같다. 야."
"이광수, 최남선 같은 변절자들 따라하는 글들 다 내다 버리라."

 

 

급진적인 몽규의 말에 발끈하는 동주는 결국 자신의 이견을 드러낸다.

 

 

"너, 이광수 선생 작품만 봤었잖아."
"아, 새끼래이, 그거이 어렸을때 얘기디."
"지금도 마찬가지지. 관습과 이념에 사로잡혀서 함부로 단정짓는거."


"관습과 이념을 타파하자고 하는 일이야. 와? 시를 빼자그래서리? 내래 이 문예지를 하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어. 시를 무시해서리 하는 이야기가 아이야."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받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그런 힘이 어드러케 모이는데! 응!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리 문학 속으로 숨는 것 밖에 더 되니?"


"문학을 도구로 밖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문학을 이용해서 예술을 팔아서 뭐 어떻게 세상을 변화 시켰는데? 누가 그렇게 세상을 변화 시켰는데?"


"....."


"애국주의니 민족주의니 뭐, 공산주의니 그딴 이념을 위해 모든 가치를 팔아버리는 거. 그, 그거이 관습을 타파하는 일이야?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조류에 몸을 숨기려고 하는 썩어 빠진 관습 아니겠니!!"


"..... 기래. 내 알았다. 동주야."

 

 


 

 

어두운 밤길을 바래다주는 동주는 어느 시인을 좋아하냐는 여진의 질문에 그냥 다 좋아한다고 얼버무린다.

 

 


'프란시스 쟘',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

 


동주의 시를 읽고 왠지 쓸쓸해졌다는 여진의 말을 듣고 있자니 동주가 시에 담는 이상이 무엇인지 말하는 듯 싶었다.

 

윤동주가 전하는 그 쓸쓸함은

우리의 삶 속에 켜켜이 박혀있는 그 외로움이기도 하지만

그가 영원히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외로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갈망과 갈증은 다름아닌 식민시대의 장벽에 짖눌려 펼쳐지지 못 할 창작에 대한 고통과 아픔은 아니었을까.

 

비단 일제치하의 제도적인 문제뿐만아니라

더이상 신앙이라는 희망이나 미래에 대한 꿈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시대 속에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던 그 시절

숱한 사람들이 꿈과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 집착하며

팍팍하다 못해 막막해진 삶이,

창작의 희망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현실이,

동주의 시에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창씨개명으로 압박해오는 일제의 규제때문에 동주와 몽규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창씨개명 신청서를 찢어려했지만 친구의 만류로 제대로 찢지 못하는 동주.

 

몽규는 또다시 떠나고 그 모습을 보는 동주는 그동안 참고 있던 질문을 던진다.

 

"넌, 왜 나한테 같이 가자는 말은 안해?"
"동주야, 니는 여기 있어야지. 걱정하지 말라."

 


몽규의 이 말은 너라도 남아서 가족 곁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몽규는 동주를 또 다른 독립의 길로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동주의 말대로 하나하나 조금씩 모인 그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그 말을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신처럼 급진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그럴수 없다는 현실을 알기때문에
누군가는 윤동주처럼 그 순간을 기록하고 전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몽규는 다시 돌아온다.

온 몸에 상처를 안고 수감된 상태로 동주와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몽규는 자금줄이 막혀 힘들어하는 임시정부를 걱정하고 어떻게 해서든 보탬이 되려는 것 말고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때 처음으로 몽규는 동주에게 말한다.

 

"동주야, 이제 어딜가든 내랑 같이 가자."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동생과 가족을 뒤로하고 일본을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동주와 몽규는 창시개명을 신청하게 된다.

 

 

그리고 1942년 1월 29일 창시개명을 하기 닷새 전 1월 24일, 동주는 참회록을 쓰게 된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일본으로 온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더욱 선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역시나 몽규는 독립운동을 위해 징병되는 조선인 청년들이 장교급으로 징병되는그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획을 세우며 조선인 청년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동주는 자신의 시를 출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위험한 조선어 번역을 맡아 출판을 도와주겠다는 그녀를 보며 동주는 몽규를 떠올린다.

 

 

그녀의 말을 듣고나서야 문득 그럴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몽규가 쉼없이 독립운동을 향해 몸을 던지는 그 원천에는 동주의 시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몽규는 동주의 시를 읽으며 마음 속 꿈틀거림을 느끼고 온 몸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니 몽규에게 동주는 단순한 사촌동생이 아니라

자신이 독립운동에 끝없이 참여하게 해주는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녀가 동주의 시집을 출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 것처럼.

 

 


 

어느날 교련을 거부한 죄로 탄압당한 동주는 학교에서 도망쳐나와 몽규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 유학생들 규합하자. 니가 하는 일에 나도 껴줘."

"야, 동주야.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니까."

"왜?"
"..."
"너는 내가 시를 쓰는게 문학으로 도망치는 거라면서 왜자꾸 나를 도망치게 만드니. 너랑 같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
"...."

 

 

그러나 결국 몽규는 동주를 놔두고 혼자 학생선동에 나선다.

 

 


쉽게 씌여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여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까.

.
.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나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말을 들으니까

정말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못하겠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게
부끄러워서
서명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창씨개명신청서를 찢지 못한 그 힘듦을 드러내듯

죄를 시인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는 대신 온 힘을 다해 찢어버린다.

 

 

 

 


 

 

 

 


그들은 둘이면서도 하나였고
정신적 영향력과 물리적 영향력의 중심이었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던 것 같다.

 

감독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그 시절 윤동주의 마음을 통해 해석한 방식이 좋다.

 

독립운동의 정신을,
시대적 흐름의 아픔을,
전쟁의 고통을

조용히 차분하게 문학적으로 풀어낸 방식도 좋았다.

 

어쩌면 이보다 더 윤동주를 윤동주답게 보여주는 영화는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의 여운이 오랜시간 깊게 스며든다.

 

 

- 2020. 11. 1 다시 쓰는 영화 동주 -


 

과거 그 시절 기록했던 영화 동주

 

 

 

시인 윤동주.

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을 견디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시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부끄러움을 알면 더 이상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말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왜 괴로웠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나라를 잃은 시기에 자신은 시인이 되길 꿈꿨던 게 부끄러웠다는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그 부끄러움 탓에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서명하는 걸 거부했다.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더 큰 부끄러움을 저지르는 악순환을 경계했다.

 

부끄러움을 알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게 아니라,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윤동주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 부끄럽지 않을 용기를 냈다.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을 맞춘 듯 윤동주는 후손들에게 깊이 되새겨지는 시인으로 부활했다.

 

 

 


 

이준익의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코 역사적 사실에 발목 잡히지 않는다.

 

이 영화는 역사가 중심이 아니라 시인, 창작자의 역할과 시대정신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젊은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적 배경은 그저 청년의 고뇌를 이해하는 걸 도울뿐이다.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부끄럽지 않을 용기다. 솔직함이다.

 

그런 면에서 윤동주는 오히려 누구보다 솔직했기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p.s.

 

이 영화는 역사적 의미나 시대적 의미에 함몰되지 않는다. (그런 시선은 어디를 봐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단 하나.

윤동주의 시를 이해하는 길잡이 영화로 본다면 이만한 영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윤동주 시집을 읽는다면 그의 감성이 이 시대에도 통한다는 걸 잘 알게 해 준다.

그 어떤 선택도 못하는 존재들의 부끄러움을 이해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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