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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 합의와 일본 거품경제의 영향, 1997-1998, 아시아 쇼크 - 윌리엄 엥달

by story-opener 2020. 12. 10.

 

 

 

아시아 호랑이 사냥 :워싱턴과 1997-1998아시아 위기

아시아 호랑이들을 사냥하기: 워싱턴 그리고 1997-98년 아시아 쇼크 By F. William Engdahl 비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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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William Engdahl

Books, articles, lectures and interviews concerning US Geopolitics. This is not what you see on mainstream press accounts nor the history that you've been ta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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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호랑이들을 사냥하기: 워싱턴 그리고 1997-98년 아시아 쇼크

By F. William Engdahl

 

비공산주의 세계에 대한 냉전기의 미국의 지배는 소련의 전 지구적 위협과 잠재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의 공격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일단 그 위협이 1980년대 말에 끝나자, 워싱턴이 잘 알고 있었듯이, 주요 군사 동맹국들에 대한 억지력이 없어졌다. 동맹국들은 잠재적인 경제적 라이벌이었다. 유럽 연합뿐만 아니라, 일본과 동아시아가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주요한 경제적 도전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 경제적 도전이 1990년 이후에 미국의 지정학적 초점이 될 것이었다.

 


 

 

 

자유 시장 개혁, 민영화, 그리고 달러 패권으로 무장하고, 강력한 월가의 금융기관들에 의해 뒷받침된 클린턴 행정부는 전에는 닫혀 있었던 영역들에 달러와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들 지역들을 시장 경제라는 워싱턴의 특이한 브랜드로 유인하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캠페인은 전에 공산주의 경제였던 동유럽과 소련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었다.

 

IMF나 달러 세계의 지령과는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의 자원들을 개발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세계의 어떠한 그리고 모든 주요 부분들을 포함하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또한 세계의 모든 주요 석유 지역들, 카스피 해로부터 이라크로 서아프리카로 콜롬비아까지를 다소간 직접적인 미국의 통제아래 두려고 하였다. 그것은 야심적인 사업이었다.

비판자들은 그것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불렀고, 클린턴 행정부는 그것을 시장 경제와 인권의 확장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냉전이 끝날 때, 대부분의 세계가 바랐던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클린턴 행정부와 그의 월가 동맹자들은 자유 시장이 부와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는 약속으로

1990년대에 지역들을 하나 둘씩 그의 직접적 통제권 아래 복속시켰다, 표어는 “세계화”였지만, 실상은 미국 은행과 금융과 기업 권력을 통해 공고하게 된 미국 권력의 세계화였다.

 

그 과정이 많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의 일부분일 것이라는 것을 거의 다 몰랐다.

자유 무역은 전통적으로 경제적 강자의 약자에 대한 요구였다.

워싱턴의 어젠다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되었을 때에는 미국은 잠재적 적대자들을 거의 무장해제 시켰고, 자신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 걸쳐 새로운 군사 기지들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자유 시장 개종자들이 신앙을 잃지 않고 , 과거의 경제적 형태로 회귀하려는 것을 억지하는 보장이 되었다.

 

1950년대에, 냉전과 아이젠하워 독트린 하에서, 미국은 국제 공산주의가 후원하는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어떠한 중근동 국가라도, 필요하면 무력을 써서라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 방편은 1945년 이후 40년 간 , 모사데에서 낫세르까지 셀 수없을 정도의 민족주의자 지도자들을 빨강 색으로 칠하기 위해 워싱턴에 의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빨간 색칠은 군사적 또는 다른 행동들을 정당화했다.

 

1990년 이후에 워싱턴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무신론의 공산주의의 위험이 더 이상 합리화 방편으로 쓰일 수 없는 지금, 미래에 그러한 대외 정책 행동들을 정당화 해주는 어떤 구실을 찾을 수 있을까? 그 답은 10년 이상 걸렸다.

 

그 사이에, 미국 제도권은 일본에서부터 시작하여 , 의심하지 않는 세계에 먹일 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그의 세계 지배의 영속이 유럽에서 태평양까지 유라시아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지정전략가인 브레진스키는 까놓고 얘기한다.

 

“...야만적인 제국들의 시대에 거슬러가는 용어로서 말하면, 제국 지정학의 3대 절대 과제는 봉신들의 공모를 방지하고 안보 종속을 유지하고, 공물을 바치는 자들이 순종하고 보호받게 하고, 야만인들이 함께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야심적 어젠다였다.

 

일본 : 우두머리 거위를 상처주기

to냉전 후의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가장 긴급한 도전 중의 하나는 그의 동맹국인 일본의 세계 무역과 은행에 대한 엄청난 새로운 경제적인 힘이었다. 일본은 전후에 자신의 군사적 보호자인 미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의 깊은 단계들을 통하여 경제력을 쌓아 올렸다.

 

1980년 대 말에 일본은 세계의 선도적인 경제력과 은행 권력으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과 “일본의 경제적 도전”에 대해서 얘기했다. 미국 은행들은 1930년 이래에 최악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미국 산업들은 고가 채무와 경쟁력 상실에 빠지게 되었다. 세계 유일 초강국을 건설하기에는 그것은 형편없는 기초였고, 부시 행정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무샤고지 같은 일본의 저명한 지성인이며 정치인들은 일본 모델의 특이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산업화 되었지만, 서구화되지는 않았다.”고 그는 주목했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서구 자본주의와는 상당히 다르다. 일본 자본주의는 국가, 경제적 부의 축적과 기술 관료의 합리성과 연관된 개념들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간단히 말해, 냉전기에는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는 지정학적 대항마로 용인되었던 일본 모델은 그 냉전이 끝나자 워싱턴에게 주요 문제가 되었다. 얼마나 주요한 문제였는지는 일본이 곧 배우게 될 것이었다.

 

1980년대에 레이건 시기의 예산 적자와 과대 지출을 워싱턴의 적이었던 일본보다 더 충성스럽고, 정력적으로 지지 했던 나라는 없었다. 독일마저도 워싱턴의 요구를 그렇게 지지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눈에는 미국 재무부 채권과 부동산과 다른 자산에 대한 도쿄의 충성과 후한 구입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금융 붕괴에 의하여 1990년대 초에 보상을 받았다. 많은 일본의 사업가들은 속으로는, 그것은 일본의 세계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없애고자 하는 고의적인 워싱턴 정책이었다고 믿었다.

1980년대 말에 ,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자이자 나중에 클린턴 재무부 장관이 된 섬머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일본을 정점으로 한 아시아 경제 블록이 형성되고 있고...일본이 소련보다 더 큰 미국에의 위협이라고 지금 느끼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옳았다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1985년 9월의 G-7 산업 국가들의 플라자 호텔 합의는 과대평가된 달러를 좀 더 다룰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 은행은 워싱턴에 의하여 미국 달러에 대해 엔의 가치를 올리는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플라자 합의와 한 달 후의 베이커-미와자야 합의와 1987년 2월의 루브르 합의 사이에 , 도쿄는 “국내 수요를 확대하고 그럼으로써 무역 흑자를 줄이는데 공헌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통화와 재정 정책을 따르기로” 합의 하였다. 베이커가 무대를 설치하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4개국 대비 달러가치 하락현상

 

 

일본의 가장 중요한 수출 시장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워싱턴은 일본에 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88년의 Omnibus Trade and Competitiveness Act에서 워싱턴은 일본을 “적대적” 무역 관행 목록에 기입하고 큰 양보를 요구했다.

 

일본은행은 1987년에 이자율을 2.5%까지 낮추었는데, 이는 1989년5월까지 유지되었다. 낮은 이자율은 일본의 미국 제품 구매를 촉진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싼 돈은 도쿄 주식시장의 활황에서 단기 이득을 취하려고 몰려들었고, 금방 거대한 거품이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 국내 경제는 자극받았지만, 무엇보다도 니케이 주식시장과 도쿄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나중의 미국 신경제 거품의 예고편처럼, 도쿄 주가는 년 간 40% 이상 올랐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부동산 가격은 어떤 경우에는 90% 이상 올랐다.

 

플라자 합의 후 몇 달 만에, 엔화는 극적으로 올랐다. 달러 대비 250엔에서 149엔으로 올랐다. 일본 수출 회사들은 수출 판매에서의 통화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수출 가격에 대한 엔의 충격을 보상하려고 “재테크”라고 명명된 금융 투기로 돌아섰다. 일본은 하루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국제 자본 규칙 하에서, 일본 은행들은 그들이 장기 보유하고 있는 관련 회사들, 즉 계열 시스템에 대한 주요 지분들을 은행 핵심 자산들로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일본 회사들에 대한 그들 주식 보유의 종이 가치가 오르게 됨에 따라, 은행 자본도 덩달아 올랐다.

 

 

1988년이 되자, 주식 거품이 한창 부풀어 오르고, 세계 10대 은행들은 전부 다 일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일본 자본은 미국 부동산, 골프 코스, 사피 휴양지, 미국 정부 채권과 심지어는 더 위험스런 미국 주식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일본인들은 충직하게 그들의 부풀려진 엔화를 달러 자산으로 리사이클 시켰다. 그 결과 1988년에 레이건을 계승한 조지 부시에 대통령직 야망에 일조했다. 1980년대의 일본의 성공에 대해 조지 소로스는 “...일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금융 권력으로 등장한다는 전망은 매우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세계 금융 거인이 될 것이라는 일본의 도취감은 단명했다. 돈 속에 파묻힌 일본 은행들의 부풀려진 일본 금융 시스템은 , 플라자 합의 이후 3년 동안에 도쿄의 니케이 지수가 300% 오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주식과 부동산 거품 중의 하나로 이끌었다.

일본 은행 담보물인 부동산 가치도 덩달아 올랐다. 일본 거품이 절정에 있을 때는, 도쿄 부동산은 달러로 환산해서 미국 전 부동산 가치보다 더 높았다. 도쿄 니케이 주식거래소에 등록된 모든 주식의 명목상 가치는 전 세계 주식 총 가치의 42%가 넘었다. 적어도 장부상으로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1989년 말기에 베를린 장벽 붕괴의 조짐이 유럽에서 표면에 나타났을 때, 일본 대장성과 일본은행은 놀랄 정도의 니케이 주식 버블을 천천히 낮추려는 신중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도쿄가 투기 열기를 식히려 하자마자, 모건 스탠리와 살로몬브라더스가 주도하는 월가의 주요 투자은행들은 새로운 파생상품들과 금융 도구들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월가 은행가들이 그 과정에서 도쿄 주식들을 팔아치우기 시작하자 , 그들의 공격적 개입으로 도쿄 시장의 질서 있는 하락은 거의 공황 상태의 팔아 치우기로 변했다. 그 결과는 일본 정부에 의한 완만한 질서 있는 교정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1990년 3월이 되자 니케이는 23% 떨어졌는데, 이는 절정일 때로부터 무려 1조$ 이상을 잃은 것이다. 일본 정부 관료들은 구소련에 대한 경제재건에 돈을 대겠다는 일본의 제안에 워싱턴과 부시 재무부의 강력한 반대를 사적으로 떠올렸다. 일본 관료들은 그 회합을 도쿄 주식에 대한 월가의 투기 공격의 배후의 가능한 이유로 보았다. 그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참이었다.

 

 

 

 

일본 대장성은 IMF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워싱턴에 의해 주장된 것처럼 문제이기는커녕 일본의 막대한 자본 잉여는 냉전의 종식에 따라서 수천억 달러의 철도와 다른 경제 하부구조 투자에 필요한 돈을 긴급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구 공산주의 경제들에게 그의 유명한 MITI 모델을 제안하였다. 워싱턴은 좋게 말해도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MITI 모델은 국가 경제 발전을 지도하는 국가에 대해 막중한 역할을 부여했다. 그것은 남한, 말레이시아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의 “자유 시장” 모델에 대한 더 나은 대안으로 많은 이들이 일본과 남한을 열심히 찾기 시작하였다. 냉전이 끝나게 될 때, 그것이 워싱턴 계획에 대한 주요 위협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동유럽과 소련을 재건하는데 일본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전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워싱턴은 전의 냉전시대의 적에 대한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돈을 대는 러시아와의 경제블록은 그 리스트에 있지 않았다.

도쿄에 주지시키기 위해, 조지 부시는 그의 국방 장관인 체니를 1990년 초에 아시아 태평양 연안의 급격한 미군 감축을 “논의”하기 위해 파견했는데, 일본의 군사 안보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작전이었다.

체니의 노골적인 등치기 임무는 구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발전을 논의하기 위한 일본 수상 카이후의 서유럽, 폴란드, 헝가리에의 1월 순방과 때를 같이 하였다. 그 메시지는 분명했다-“워싱턴이 시키는 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희 국방을 너희에게 넘기겠다.”

 

그 해 3월 일본 수상이 미국 대통령을 팜 스프링에서 만났을 때에는 , 그는 미국의 진의를 숙지했다. 일본은 동유럽에서 미국 달러와 경쟁해서는 안 된다. 몇 달 안에 일본 주식은 액면가로 5조$나 잃었다. 주식회사 일본은 크게 상처받았다.

 

일본 모델 해체의 두 번째 국면은 자유 시장의 조야한 개인주의라는 미국의 지시에 도전하는 성공적인 모델인 동아시아 경제권을 파괴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일본 모델은, 워싱턴이 잘 알고 있듯이,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후에, 그것은 남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다른 동아시아 경제들에서 실행되어 왔다. 1980년대에 이들 급성장하는 경제들은 호랑이 국가들이라고 명명되었다.

 

 

동아시아는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에 일본의 경제 원조, 대규모 민간 투자와 MITI의 지지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거의 소리 없이 진행되었지만, 사실상 1980년대의 동아시아의 번창하는 경제들은 의도적인 지역 노동 분업에 힘입은 바가 큰데, 거기에는 일본이 중심에 있고 일본 회사들은 제조과정들을 동아시아 중심들에게 하청했다.

그들은 아시아 사업계에서는 일본 경제와의 긴밀한 연계 때문에 엔 불록 국가들이라고 지칭되었다. 그들 호랑이 경제들은 IMF 자유 시장 모델에게 주요한 골치 덩어리였다. 사적 기업과 강한 국가의 경제적 역할을 혼합하는데 있어서의 그들의 바로 그 성공은 IMF의 자유 시장 아젠다에 대한 위협이었다. 강력한 국가 역할에 기초를 둔 모델을 갖고 호랑이들이 성공 하는 한 , 구 공산주의 국가들과 다른 나라들은 극단적인 IMF 처방에 반대하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동아시아의 매년 7-8%의 경제 성장률과 사회 안전 보장의 증대, 보편 교육과 높은 노동 생산성은 비록 시장 경제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국가 지도와 계획에 의해서 뒷받침 되었다. 이것은 자애로운 가부장 제도의 아시아적 형태였다. 자족적인 아시아 호랑이 경제들은 1990년대에 워싱턴에 의해서 요구되는 달러 자유 시장 시스템의 지구적 확산에 대해 소비에트의 중앙 계획보다 더한 장애물이었다.

 

일본 은행들이 주식과 부동산 붕괴와 씨름하고 있을 때인 1993년의 APEC 정상 회담에서부터 미국 관리들은 동아시아 경제들에게 , “동등한 경쟁 조건”을 위하여, 자유로운 자본 유출입에 대해 그들의 통제된 금융 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 채무가 없는 동아시아 경제들은 IMF 차관이나, 보통 장기적인 국가 목적의 일부분인 제조업에 대한 직접 투자를 제외한 외국 자본에 대한 의존을 회피했다. 지금 그들은 외자 유출입과 단기 외자 대출에 대해 그들의 시장을 개방하라는 말을 들었다.

“공정한 경쟁 조건”이라는 수사에 대해 , 많은 아시아 관리들은 워싱턴이 크리켓인지 그들의 경제적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지에 대해 사적으로 의아해 했다. 그들은 금방 배우게 될 것이다.

 

 

일단 자본 통제가 완화되고 외국 투자가 자유롭게 유출입하게 되자, 남한과 다른 타이거 경제들은 갑작스런 외국 달러의 홍수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 결과는 1991년과 1997년 5월 태국 바트화에 대한 공격 개시 사이에 고급 부동산과 각국 주식과 다른 자산들에 대한 투기적 거품의 창조였다.

 

일단 아시아 호랑이 경제들이 외국 자본에 대해 문을 열기 시작하자, 미처 그들이 가능한 남용에 대한 알맞은 통제들을 갖추기도 전에, 헤지 펀드들은 공격에 들어갔다. 비밀 펀드들은 가장 약한 경제 즉 태국을 우선 지목했다.

 

 

 

 

미국 투기가인 조지 소로스는 시티그룹을 포함한 국제 은행들 그룹으로부터 밝혀지지 않은 신용으로 무장하고 비밀리에 행동했다. 그들은 태국이 바트화를 평가절하하고 달러에 대한 고정 환율을 깨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기했다. 퀜탐 펀드의 조지 소로스와 타이거 펀드의 장이고 , 또한 LTCM 헤지 펀드의 장이라고 보도된 태국 통화와 주식에 대한 어마어마한 투기 공격을 감행하였다.

6월에 태국은 항복하고 통화는 유동적이 되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IMF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연달아서 신속하게 그들 헤지 펀드들과 은행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와 남한을 쳤다. 민중들이 경제적 혼란과 빈곤 속에 가라앉을 때, 그들은 수십억 달러를 챙겼다.

 

 

찰머스 존슨은 그 결과들을 직설적인 용어들로 묘사했다: “그 펀드들은 쉽게 태국, 인도네시아와 남한을 강간했다. 그리고는 떨고 있는 생존자들을 IMF에 넘겼는데, 그 희생자들을 돈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떠한 서구 은행도 초토화된 나라들에서 대충해준 돈을 못 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유럽의 아시아 전문가인 Kristen Nordhaug 교수는 1997년의 클린턴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을 요약했다. 클린턴은 처음에 월가 투자 은행가인 로버트 루빈이 장으로 있는 새로운 국가 경제 위원회를 써서, 주요한 경제 전략들을 개발했다. 동아시아 신흥 시장은 공격 목표로 정해졌다.클린턴 행정부는 국제 금융 자유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IMF와 같은 다자간 기구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Nordhaug은 주목했다. “동아시아 시장을 타켓으로 하는 전략이 수립되자 , 미국 행정부는 IMF를 통하여 무역과 금융 자유화와 제도 개혁들을 촉진시킬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달러에 대한 아시아 위기의 충격은 주목할 만 하다. BIS의 General Manager인 Andrew Crockett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1996년에 투기적 핫머니들이 흘러 들어오게 됨에 따라, 총 적자가 330억$ 에 달한 반면, “1998-1999년에는 870억$ 흑자로 반전되었다”고 주목했다.

 

2002년에는 흑자가 2000억$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잉여의 대부분은 미국 재무부 채권의 구입이란 형태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 왔는데, 이는 사실상 워싱턴 정책에 돈을 대는 꼴이다. 일본 대장성은 300억$의 아시아 통화 기금을 제안함으로써 그 아시아 위기를 막으려고 헛되이 노력하였다. 워싱턴은 그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아이디어는 재빨리 취소되었다.

아시아는 IMF를 통하여 또 다른 하나의 달러 체제의 한 지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재무부 장관 루빈은 그것을 미사여구를 써서 미국의 “강한 달러 정책”이라고 명명하였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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